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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한국 전쟁)에 대한 이야기.

category 말하기. 2019. 6. 25. 17:24

 

(출처 : LG공식 블로그)

 

6.25 전쟁(한국 전쟁)에 대한 이야기.

 

2019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한지 69주년되는 날이예요.

저를 포함해서 많은 분들이 알고계신

6.25, 한국전쟁에 대해 포스팅 해볼게요.

(출처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예요.)

 

- 6.25 전쟁(한국 전쟁)이란? -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북한이 '폭풍'이라는 작전명으로
북위 38선 전역에 걸쳐 남한을 선전포고도 없이 불법 남침하면서 발발한 한반도 전쟁.

 

 

- 소련, 중국, 북한의 남침 전쟁 모의 -

 

1945년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과 함께

한반도는 광복을 맞이했고 38선을 경계로

남,북한은 미국,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됐어요.

 

그렇게 자유민주주의, 공산주의로 나눠졌는데

두 체제가 양립되기는 어려웠다고 해요.

 

북한의 김일성은 무력을 써서라도 남한을

공산화시키길 원했고 공산화를 위한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어요.

 

남한은 당시 국가 기틀을 마련하는 것도

힘들어했던 반면에, 북한은 일제에게

중공업 지대를 받은 것도 있었고

소련의 적극적인 지지도 등에 업고 있었거든요.

 

 자료에서 찾아보면 김일성은 북한정권 수집 직후인

1948년 9월부터 무력 남침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신년사에서 국토완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무력 남침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거죠.

 

그렇게 김일성은 1949년 3월 스탈린에게 가서

"나 이렇게 이렇게 남침 할꺼야"

라면서 무력 남침 계획을 타진했지만

스탈린은 "아직 때가 아니야 더 준비해" 라며

소총 1만 5천 정, 포 139 문, T-34전차 87대

항공기 94대 등 무기를 지원해주면서

"마오쪄둥 하고도 얘기 좀 해봐." 라고 말했죠.

 

결국 중국에 가서 마오쪄둥에게 얘기하지만

그 또한 "응, 아직 아니야. 기다려" 라며

중국인민해방군 내 조선인 2개 사단을 넘겨줘요.

 

당시 소련은 원자탄을 보유하지 않은 상황이라

전쟁을 하게 되면 미국의 원자탄이 무서웠기 때문에

49년 3월은 절대 안된다고 얘기했는데, 만약 북한이

전쟁을 일으키면 미국과 싸울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소련은 미국과 전쟁을 할 상황이 아니었던거죠.

 

1949년 6월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고

김일성은 8월 스탈린한테 "이제 남침 할래"를 하지만

스탈린은 여전히 "아직 아니라고!" 거부했고

김일성은 "강원도 쪽만 좀 먹을어요." 라고 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라면서 제지했어요.

 

- 그래! 가자! 남침 결정 -

 

1949년 8월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고

10월에는 마오쩌둥이 중국을 공산화하면서

정세는 공산진영에게 긍정적으로 흘러갔어요.

 

김일성은 중국 공산화시 미국이 개입을 포기하자

남친을 해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거라 생각했죠.

 

1950년 4월초. 김일성과 박헌영은 비밀리에

다시 모스크바를 방문해서 선제 남침을 승인 받아요.

스탈린은 중국이 동의한다는 조건으로 승인해주는데

 "소련이 시킨게 아니다" 라는 핑계용이었어요.

결론적으로 김일성과 스탈린, 마오쩌둥이 치밀하게

모의하고 준비한 계획적인 전쟁이었죠.

 

북한의 남침 계획은 3단계로 이루어져 있어요.

 

첫번쨰 단계는 서울지역 점령.

두번째 단계는 대전까지 점령.

세번째 단계는 부산까지 완전 점령.

 

이 또한 소련이 깊이 관여했어요.

아무튼 스탈린은 1950년 6월 16일

남침 개시일자를 6월 25일로 승인하는데

그들한테는 가장 큰 걱정거리가 있었죠. 

그건 바로 

미군의 참전 가능성이었는데요.

많은 고민 끝에 미군 도착 전 그냥 전쟁을

빨리 끝내버리자는 계획을 세워요.

 

빨리 서울을 점령하고 남하한 후에

미군이 한반도 상륙을 막고 2개월내

전쟁을 끝낸다는 계획이었어요.

 

- 북한의 기습 남침! -

1950년 6월 25일 새벽4시 북한군은

선제타격작전 계획에 따라 38도선

전 전선에 걸쳐 남침을 개시하기 시작해요.

 

서쪽의 옹진반도로부터 동쪽으로

개성, 동두천, 포천, 춘천, 주문진에 이르는

38도선 전역에서 공격을 개시하고

강릉 남쪽 정동진과 임원진에는

육전대와 유격대를 상륙시켜요.

 

그리고 김일성은 6월25일 오후 1시35분

평양방송을 통해 “남한이 이날 아침 옹진반도에서

해주로 북한을 공격하였다“고 주장하며, 북한은

그에 반격한 것이라고 남침을 은폐했어요.

 

그렇게 한국군은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북한군의 기습 공격을 저지할 수 없었어요.

 

T-34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은 전쟁 당일

개성(파주-문산 축선)과 동두천,

포천(동두천-의정부 축선)을 점령했고

서부전선에서는 파주, 문산을 거쳐

중부전선에서는 동두천, 의정부를 거쳐

바로 서울로 진격했어요.

 

특히 의정부-서울 축선에서 북한군은

국군의 7배가 넘는 전투력을 집중하여

국군의 후방 주둔 사단이 전방으로

속속 투입되었으나 역부족이었죠.

결국 28일 새벽. 미아리 방어선이 뚫리게 되요.

 

하지만 이런상황에서도 춘천에서는

육군 6사단은 북한군 2사단에 맞서

남하하던 북한군의 발을 3일이나 묶어버려요.

(2사단이 고전해서 12사단이 지원을 갔는데

지원간 12사단이 전멸해버려서 지금 북한에는

12사단이 없다는 얘기가 있어요.)

 

- 무능한 정부의 탈출 -

 

북한군에 의한 서울 함락이 임박하자

이승만 정부는 서울을 탈출해버려요.

 

정부와 대통령이 살아 있어야 했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었겠지만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시민에게 제대로

알리지도 않고 서울을 탈출해버렸다는 거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남하를 지연시킨다는 이유로

6월 28일 새벽 2시 한강대교를 그냥 폭파해버리는데

당시 시민들은 정부의 서울 사수 방송을 믿고

피난을 가지 않은 상태였고, 그날 낮 북한군이

서울에 입성하면서 90만명에 달하는 서울 시민이

9.29 수복 때까지 석달 간 끔직한 통치를 받아야했죠.

 

그렇게 정부는 임시로 대전으로 옮겼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옮겨요.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고 3일 간 그 곳에서

지체한 북한군 덕분에 한국군은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고 유엔군의 참전이 가능해졌어요.

(그래도 한강대교 폭파는 잘못한 일이죠..)

 

- 미국의 참전 -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의 남침 사실을 보고 받은

25일 오전 주한 미국대사 무초를 만난자리에서

이렇게 얘기했다고 해요.

 

“(자신은) 한국을 제2의 사라예보로 만드는 것을

피해왔으나 현재의 위기가 한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선의 기회를

제공해 준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미국 현지 시각 1950년 6월 24일 휴가지에서

남침 사실을 보고 받은 트루먼 대통령은 격노했고

그는 “우리는 모든 수를 써서 그들을 막아야 한다”

고 했다고 해요.

 

그는 한국이 공산화되면 일본이 위협받고,

세계 반공 전선에서 미국의 신뢰도가 떨어질 것을

우려하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소집을 지시해요.

 

6월 25일 유엔 안보리는 북한의 남침을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38도선

이북으로 북한군의 퇴각을 요구하지만

북한이 이를 무시하자 이틀 후인 27일

UN군의 파병을 결의해요. 

 

대한민국은 유엔 결의로 태어난 국가로

그런 나라를 침략하는 것은 곧 유엔을

침략한 것과 같다고 판단한거죠.

 

7월 초 유엔군을 지휘할 통합군사령부가 설치되고,

그 유명한 맥아더가 유엔군 사령관에 임명되요.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서 16개 국 파병,

의료지원 5개 국 등 총 21개 국이

6.25전쟁에 참전했고 39개 국이

물자지원을 해주는 등 총 60개 국이

지원에 나섰어요.

 

미국은 이와 별도로 남침 개시 다음 날인

6월 26일부터 주일 미 해군과 공군을 투입하고

6월 29일에는 맥아더 장군이 한강 남안

영등포에 와서 전선을 시찰하고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할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어요.

 

- 낙동강 방어선 전투! -

 

한국군의 방어계획은 이러했어요.

 

"남침 시 일시 후퇴하여 북한군을

남한 깊숙이 끌어들였다가 반격한다."

 

1차 방어선은 한강.

2차 방어선은 금강.

3차 방어선은 낙동강.

 

북한군에 밀려 후퇴한 국군과 유엔군은

8월 초 마침내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하기에 이르렀어요.

 

대구부터 마산까지 서남부 방어는 유엔군이

대구부터 포항까지는 국군이 방어를 맡았고

 국군과 유엔군은 8월 초에서 9월 중순까지

낙동강전선에서 북한군과 혈전을 계속했어요.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한 미군은

북한군에 맹폭을 퍼부었고

지상에서는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군을 저지했어요.

 

특히 대구로 통하는 전술적 요지인

칠곡군 다부동에서는 55일간이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어요.

고지를 10여 차례나 뺏고 빼앗기면서

북한군 2만 4천여명, 국군과 유엔군 1만여명의

사상자가 나온 전투에서 국군 1사단은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여 대구를 지키는데

큰 공을 세웠어요.

 

- 인천상륙작전! -

 

맥아더가 이끄는 UN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는데

유엔군 상륙부대가 한반도 중부에서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면 낙동강전선의

유엔군이 대반격을 한다는 계획이었어요.

 

인천상륙작전이 군사·전략적으로 갖는

가장 큰 의미는 전세를 일거에 전환시킨

터닝포인트라는 것이예요.

 

북한군의 기습으로 한국군이 수세에 몰렸고

낙동강 방어선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

일거에 전세를 전환시켰던 가장 중요한

작전 중의 하나라고 평가할 수 있죠.

 

상륙 작전 후 전세가 완전히 역전됐고

유엔군과 국군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했어요.

 

그 기세를 몰아 38선을 넘어서 평양을 입성

압록강까지 도달하고 전쟁이 끝이보일때쯤..

 

- 소련과 중국의 참전 -

 

10월 1일 김일성은 "도와주세요!"를 외쳐요.

10월, 11월 중국과 소련이 참전하고

서부전선에서 유엔군이 패배하면서

동부전선에서 유엔군이 흥남에서 철수하고

결국 51년 1월 4일서울을 다시 준공군에 반납하지만

51년 3월 15일 유엔군은 다시 서울을 되찾아요.

결국 3월말 38선을 회복하죠.

 

- 휴전회담 -

 

51년 4월~5월 중공군의 춘계공세 이후

양측은 모두 무력으로 답이 없다는걸 알았어요

그렇게 휴전협정을 시작했지만 이승만은 거부.

사실 이 거부는 평화가 보장되지 않은

휴전은 거부한다는 의미였어요.

 

 결국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우여곡절 끝에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어요.

 

3년 1개월 2일, 1,129일 동안 계속됐던

6.25전쟁은 휴전상태로 들어가게 되었고

현재까지 휴전국가로 남아있게 됐어요.

 

하루빨리 다 끝났으면 좋겠네요.

서로 두루두루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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